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.26 사건 (문단 편집) === [[차지철]]과의 갈등 때문이다 ===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의 권력 투쟁과 갈등 속에서 10.26이 발발했다는 것이며 '''가장 유력한 설'''이다. 주변 인사들에 의해서 주로 증언되고 있고 드라마 [[제4공화국(드라마)|제4공화국]], [[제5공화국(드라마)|제5공화국]], 영화 [[남산의 부장들]] 등에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. [[김종필]] 전 [[국무총리]] 역시도 김재규가 10.26을 일으킨 것은 차지철과의 갈등에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. 전두환도 "우군 싸움이 [[김일성]]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하다"고 말했을 정도였다.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해서 이에 대해서 격분했고 이것이 10.26의 발단이 되었다는 주변인물들의 증언이 있다.[[http://news.joins.com/article/18371799|출처]]. 김재규가 교사 시절 아끼던 제자였고 가깝게 지냈던 [[이만섭]] 전 [[대한민국 국회의장|국회의장]] 역시도 김재규와 차지철의 관계가 사건의 발단이 된 것 아닌가 추측한다고 방송이나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기도 했다.[[http://news.khan.co.kr/kh_news/khan_art_view.html?artid=200908031802395|출처]] 이 관점에서 보면 10.26은 권력의 조화가 깨진 순간에 발생한 우발적 사고에 해당한다. 특히 유신 정권 시절에는 중앙정보부, 대통령경호실, [[국군보안사령부]] 간에 상호 견제와 갈등이 상존하고 있었다.[[http://www.usjournal.kr/News/6936|출처]]. 김재규의 지위는 언뜻 탄탄한 듯 보였지만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[[차지철]]의 대두로 위협받고 박정희의 신임을 잃고 있었다.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[[부마민주항쟁]]의 수습 과정에서 갈등이 있다. 위에서 언급한 당시 김재규의 진술에서 김재규 자신은 온건 대응을 주장했지만 차지철은 [[킬링필드|300만을 들먹이며]] 강경 진압을 주장하면서 김재규를 깠고 박정희도 이에 동의했다고 주장하였다.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왔다. 1979년 5월 중순 경 어느 날 [[신민당(1967년)|신민당]] [[총재]]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 관련된 보고를 부장에게 올리는 중정 간부회의 때 김재규는 "차지철이는 [[신도환]]을 어떻게 조종한건지 모르겠다. 신도환이 무슨 보스야? 차라리 [[이기택]]이 훨씬 낫지..." 라며 분통을 터뜨린 적이 있다. 이는 차지철이 신도환으로 하여금 [[김영삼]]의 신민당 총재 당선을 저지하고 [[이철승]]의 연임을 도모하는 공작을 펼쳤지만 신도환 계보이던 이기택이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어 이탈한 뒤 최종적으로는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실패로 돌아가자 그 책임을 모조리 중정의 무능함으로 돌린 것에 대한 신경질이었다. 당시 차지철은 경호실 내에 정보처를 신설하여 산하에 사설 정보대를 운영하고 여야 양쪽에서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국회의원들을 규합하여 중정이 해 오던 정치공작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. 정보는 경호실이 쥐락펴락 하고 정작 중정은 경호실의 심부름이나 하는 신세가 됐으니 김재규로서는 상당히 불쾌하지 않을 리 없었다.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 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 문제와 부마 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 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하게 되고 10.26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. [[http://news.donga.com/3/all/20130906/57493166/1|출처]] 박정희는 5.16 직후부터 여러명의 측근 들에게 골고루 힘을 실어주면서 서로 충성경쟁을 시키는 소위 '2인자 박치기'를 통해서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왔다. A가 올라온다 싶으면 B한테 힘을 약간 더 실어주고, 다시 B가 커졌다 싶으면 또다른 C와 A한테 살짝 기우는 식으로... 이러한 용인술은 절대 1인자가 될 수 없는 [[2인자]]들이 해바라기처럼 오직 자신한테만 충성하면서 서로간에 긴장감을 가지고 서로 견제하는 구도를 만들어서 정권의 기반을 탄탄하게 하는 방법이었다. 하지만 말년에 들어서는 그런 긴장감을 유지시키는데 실패하고 일방적으로 차지철에게만 무게를 실어주어 결국 갈등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. 하지만 부마 항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 박정희를 만난 김재규가 스스로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이야기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기에, 그가 권력에서 밀려나는 상황을 우려하여 10.26을 일으켰다는 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.[[http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2&oid=002&aid=0002017191&viewType=pc|출처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